법흥왕 18년
여름 4월에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해 국사를 총괄해 맡아보게 하였다. 상대등이라는 관직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지금의 재상과 같은 것이다.
법흥왕 15년
이때 와서 법흥왕 역시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구설이 비등하므로 왕도 난처하였다. 이때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혹은 처도(處道)라고 한다]이 왕에게 아뢰기를 "청컨대 제 목을 베어 여러 사람의 논란을 진정시키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본래 불도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거늘,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다시 대답해 말하기를 "만약 불도가 퍼질 수만 있다면 저는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유감이 없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결코 흔한 사례는 아니지만 도비타야처럼 전투에 직접 참가하는 장인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전투 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기록이 남아 있지도 않다. 이번에도 역시 그러했다. 전투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무사이고, 그들이 다루는 창이나 방패를 만드는 자는 조역이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지증 마립간 3년(502)
봄 3월에 명령을 내려 순장(殉葬)을 금지하였다. 이전에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사람을 순장했는데, 이때 와서 그것을 금지한 것이다.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新)이란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羅)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당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가 한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